|
타오르는 책 |
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
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
재가 되어버리는 책을
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
내 눈길이 닿을 |
|
|
|
손 |
형은 평생 독선생을 자청한
할아버지의 두툼한 손을 가졌다
고등학교를 들어갈 나이가 되어서도
공책 몇 장씩 가족 이름만을 필사하던
장애 이급의 손을 가졌다
|
|
|
|
파리 |
겨울이 되니 파리가
천장에 붙어 꼼짝하지 않는다.
나는 파리채로 파리를 잡았다.
여름에는 잘도 도망가다가
지금은 아예 꿈쩍도 안 한다.
그래서 내년 여름 |
|
|
|
지구, 한 컵의 물 |
하루해를 보내고 돌아와서
투명하고 첨언 없는 물 한 컵을 그로부터 받는다
그는 손도 없이 내 앞에 서 있다
내가 밟고 하루를 다니는 그 땅에서 올라온 물
|
|
|
|
소풍 가는 날 |
나는 디지털 노마드
지금부터 짐을 챙기자
노트북컴퓨터 센트리노 1.8G/ 하드 80G
USB 메모리 512M
디지털카메라 900만 Pixel
MP3 플레 |
|
|
|
쇠똥구리 |
소똥을
탁구공만하게
똘똘 뭉쳐
뒷발로 굴리며 간다
처음 보니 귀엽고
다시 보니,
장엄하다
꼴을 뜯던 소가
무심히 보고 있다
저녁 노을이 지고 있다 |
|
|
|
나는 고슴도치가 함함하다 |
나는 고슴도치가 슬프다
온몸에 바늘을 촘촘히 꽂아놓은 것을 보면 슬프다
그렇게 하고서 웅크리고 있기에 슬프다
저 바늘들에도 밤이슬이 맺힐 것을 생각하니 슬프 |
|
|
|
몽대항 폐선 |
저기 졸고 있는 개펄의 폐선 한 척이
앞에 서 있는 여자 한 명을, 아니
그 옆의 친구들까지를
그립게 했다가 외롭게 했다가 한다.
그렇게 밀고 당기는 속성 |
|
|
|
여름밭 |
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
재는 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가 있지
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
그냥 둬보자는 것이다
고구마 |
|
|
|
외딴섬 |
네 잘못이 아니다
홀로 떠 있다고 울지 마라
곁에는 끝없는 파도가 찰랑이고
위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단다
떼 지어 몰려다니는 것들을 보아라
홀로 |
|
|
|
Prev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Next |