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‘나의 멍멍개’ |
이제 막다른 골목에 왔다
길은 막혔다
길은 이것뿐이다
이 길은 아무도 돌아가 본 적 없는 일방통로
어디쯤까지 히히대고 같이 오던 친구들은
언제 어디선지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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임성규(1968 - ) ‘얼음꽃’ |
새벽은 슬픔을
양떼처럼 몰고 간다
약해진 폐를 두드리는 긴 울음소리
미명을 견딜 수 없다,
자꾸 네가 보인다
내 생이 얼어붙는 어느 한 순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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정공량(1955 - ) ‘희망에게’ |
아득함에 지쳐 노래 부르고 싶을 때
너를 만나리라
사랑하다 지쳐 쓰러져 울 때도
너를 만나리라
멀리서 그러나 더욱 가까운 곳에서
물리칠 수 없는 고통과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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‘귀’ |
젖은 티슈 한 통 다 말아내도록
속수무책 가라앉는 몸을 번갈아 눌러대던
인턴들도 마침내 손들어
산소 호흡기를 떼어내려는 순간,
스무 살 막내 동생이 제 누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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‘ 저녁 눈’ |
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
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
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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‘버팀목’ |
머리 잘려나간
팜트리(Palm tree) 하나 서있다
나아갈 길 찾아 허공을 더듬으며
땅위를 기어가던 담쟁이
그 내미는 손마다 자신의 온 몸 내어주고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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‘내 얼굴에 똥을 싼 갈매기에게’ |
고맙다 나도 이제 무인도가 되었구나
저무는 제주바다의 삼각파도가 되었구나
고맙다 내 죄가 나를 용서하는구나
거듭된 실패가 사랑이구나
느닷없이 내 얼굴에 똥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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식료품점에서 |
등이 꾸부정한 할머니 한 분이
장바구니 카트의 물건을
계산대 위에 옮겨 놓는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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‘굵은 비 내리고’ |
굵은 비 내리고
나는 먼 곳을 생각하다가
내리는 비를 마음으로만 맞다가
칼국수 생각이 났지요
아시죠, 당신, 내 어설픈 솜씨를
감자와 호박은 너무 익어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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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아침의 시 |
아직 밖은 매운 바람일 때
하늘의 창을 열고
흰 불꽃을 터뜨리는
목련의 한 획,
또는
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
그 쏟아낸 혈흔(血痕)을 지워가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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